'뜨거운 상징'의 생애

김현작가의 어린시절모자와 검정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김현작가의 학창시절 모습모자와 검정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김현작가의 학창시절 모습
1세 - 1942년

7월 29일, 부친 김요환(金繞煥)과 모친 정순예(鄭順裔) 사이에서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나다. 본관은 경주(慶州), 본명은 광남(光南)이며, '현'은 필명이다. 출생지인 전남 진도군 진도읍 남동 565번지는 부모님 대에 이주한 곳이다.

7세 - 1948년

진도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모를 따라 7월 목포 북교국민학교로 전학하다. 부친은 북교동 127번지에 '구세약국'을 열어 성공하고, 유복한 환경 속에서 목포를 실질적인 고향으로 삼게 되다.

12세 - 1954년

3월에 북교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에 입학하다. 독서에 몰두하는 한편 시·산문 등의 창작에도 관심을 가지다.

15세 - 1957년

목포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교지 『등대』에 「눈을 감으면」이라는 시 1편과 신문팔이 생활을 다룬 「해와 달의 생리」라는 콩트 1편을 발표하다. 서울의 경기고등학교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목포의 문태고등학교로 진학하다. 곧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하여 북아현동에서 둘째 형인 기협과 함께 생활하다.

17세 - 1959년

불문학을 중심으로 문학에 많은 관심을 쏟다. 경복고등학교 교지 『학원(學苑)』에 황순원의 소설 『인간접목』을 논한 「인간은 탄생하라」는 평론을 발표하다.

18세 - 1960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하다. 김승옥, 김치수와 만나다. 4·19에 참여하다. 이후 4·19는 김현의 자부심이 된다.

19세 - 1961년

문단 데뷔 평론이 될, 「나르시스 시론(詩論)」을 쓰다. 5·16 군사 쿠데타 일어나다. 프랑스 작가들에서 한국의 현대 작가들로 독서의 폭을 점차 넓히다.

졸업식날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20세 - 1962년

'김현'이라는 필명으로 『자유문학(自由文學)』 (3월호) 제5회 신인당선작품 평론 부문에 「나르시스 시론(詩論)」을 발표하며 등단하다. 김승옥, 최하림 등과 함께 소설 동인지 『산문시대』 창간호를 간행하다.

21세 - 1963년

『산문시대』 3호와 4호를 내다. 김치수, 염무웅, 서정인, 곽광수, 김성일이 새로 참가하다. 사람을 '조직'하는 그의 역량이 이 시기를 전후해서 발휘되기 시작하고, 술 실력이 점차 늘어가다. 「이상(李箱)에 나타난 만남의 문제」와 「만남 혹은 시인의 환상」이라는 평론을 쓰다.

22세 - 1964년

『산문시대』를 5호로 종간하다. 「초현실주의 연구」란 논문으로 졸업 후 불문과 대학원에 진학하다. 7월, 첫 저서가 되는 『존재와 언어』를 출판하다. 고은과 막역한 술친구가 되며, 후에 『68문학』을 함께할 이청준과 자주 다투면서 친해지다.

24세 - 1966년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정현종과 시 동인지 『사계』를 만들다. 김주연, 김치수와 더불어, 김병익과 친교가 이루어짐으로써 훗날 『문학과지성』을 만드는 네 김씨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다. 동시대 작가들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평론을 활발히 쓰기 시작하다. 평생 그를 사로잡게 될 바슐라르를 접하다.

25세 - 1967년

「셀린의 『구토』에 대한 연구」란 논문으로 대학원을 졸업하다. 10월, '세계문화자유회의'에서 김붕구 교수가 발표한 「작가와 사회」라는 발제문을 두고 벌어진 순수·참여 논쟁에 가담하여, 순수·참여라는 이분법 대신 '문화의 고고학'적 태도를 가질 것을 역설하다.

26세 - 1968년

김승옥, 김주연, 김치수, 박태순, 염무웅, 이청준 등과 『68문학』을 창간하다. 레비 스트로스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에 대한 글 「구조주의의 확산」을 쓰다. 1950년대 작가들과 '세대 논쟁'을 야기할 「1968년의 작가 상황」을 연말에 발표하다.

27세 - 1969년

세대 논쟁이 본격화되다. 1960년대 작가들이 1950년대 작가들과 구별되는 기준을 작가들의 언어에서 찾으려고 하다. 김지하의 시 「황톳길」 등을 『시인』지에 소개하며, 김지하의 문단 데뷔를 돕다.

타이와 자켓을 입고 찍은 단체사진
28세 - 1970년

4월에 『사상계』지의 「4·19 혁명과 한국 문학」이라는 좌담에 참가하여 리얼리즘 문제를 두고 구중서와 논쟁을 하다. 6월에 이연희(李連嬉)와 결혼하다. 9월, 김병익, 김치수와 함께 황인철 변호사가 편집동인으로 참가하여 계간 『문학과지성』을 창간하다.

29세 - 1971년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전임강사가 되다. 4월, 장남 상구 태어나다. 김주연이 귀국하여 『문학과지성』 편집 동인에 합류함으로써 네 김씨 편집 체제가 이루어지다. 10월, 대학신문의 좌담 「한국 근대 문학의 기점」에 김윤식과 함께 참여함으로써 공동으로 쓸 『한국문학사』의 토대를 마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