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한 선비 집안의 맏아들

김우진작가의 유년시절 모습으로 검정색모자와 코트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

김우진은 1897년 장성 군수였던 김성규와 순천 박씨의 장남으로 장성군 용강면에서 태어났다.그는 호를 처음에는 초여, 일본 유학 중에는 초성, 귀국 후에는 수산을 사용했다. 수산은 목포에서 연유한 것이고 초성은 니체의「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태양을 가리키는 '불타는 별' 의 의미로 지은 것이다. 부친이 장성 호남선우의숙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수학하던 중 동학운동의 여파로 가족이 목포 북교동 성취원으로 이사하였다.

성취원은 유달산 동쪽에 위치한 99칸의 대궐 같은 집으로 부친 김성규가 무안항 감리로 재직하면서 거주하던 곳이다.소년시절 익힌 한문 실력은 훗날 일본 유학시절에 고전을 탐독하고 시를 지으며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1910년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이후 1913년 일본인들이 다니던 목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를 1년 수료하였다.

농업학교 시절

김우진은 집안의 토지관리를 위해 농업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가서 현립 구마모토농업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 새로운 일본 건설을 위한 첨단농업학교였다. 그는 재학 중 여러 과목을 배웠고 성적도 뛰어났다. 영어(99), 수신(100), 논문(95), 독서(90) 등 유독 인문 관련 과목이 우수했고 특히 영어 성적이 뛰어나 와세다대학 영문과 진학의 계기가 되었다. 이 기간에 빅토르 위고, 셰익스피어, 다눈치오 등을 사숙하였다.

17세에 단편소설「공상문학」을 '정로생' 이라는 필명으로 창작할 정도로 문학에 열의를 보였다. 재학 중인 19세에 부친의 뜻에 따라 전남 곡성 출신의 유학자 정운남의 딸인 정점효와 결혼하여 21세에 장녀 진길이 태어났다. 같은 해「조선에서의 삼림사업 일반」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농업학교(16회)를 졸업했다.이 때 뛰어난 논문임을 인정받아 영친왕에게 5원의 우등상금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농업보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때였다.

시대의 지식인이자 문인

농업학교 졸업 후에 김우진은 귀국하라는 부친의 뜻을 따르지 않고 1919년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해 1921년 영문과 본과로 진학했다. 동경 유학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의 한 지식인이며 작가로서의 문예적 체험과 능력, 선구적인 문학사상을 성숙시켰다. 이때부터「마음의 자취」라는 제목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일기 속에는 식민시대 국가 주권의 상실을 통한하면서 일본의 통치에 대한 과감한 저항과 민족자결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유학생들의 정치적 집회에 참여하고 2·8 사건에 관련하여 수감된 유학생들을 수차 면회한 기록도 전한다.

또한 민족어에는 민족적인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고 한글로 쓴 일기를 통해 작품도 한글로 쓰려는 의지를 밝혔다.그리고 3·1운동 이후 격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시대정신을 이끌만한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나타내었다.

극예술협회 결성과 연극비평활동

1920년 봄 조명희, 홍해성, 김영팔, 유춘섭, 진장섭, 고한승, 조춘광, 손봉원 등 20여명과 함께〈극예술협회〉를 결성하였다. 기존의 낡은 신파극을 비판하고 새로운 근대극을 연구하고 실현하자는 선각적인 목적이었다. 그는 서양의 사실주의 연극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극예술활동을 주도했다. 또한 연극·문학 비평 활동을 하면서 창의적이고 근대적인 문학 창작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21년 동경 고학생과 근로자들의 모임인 동우회 회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국내 순회공연을 결행하였다. 이 순회공연은 임세의 단장, 김우진 연출, 홍해성이 무대감독을 맡고 막간에 홍난파와 한기주의 연주 그리고 윤심덕의 독창이 공연되었다.

부산을 시작으로 40일 동안 25개 지역을 순회하였고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극운동이며 근대극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의의를 갖는다.

귀국, 가업과 문예활동

김우진작가의 가족사진으로 두아이와 사진을 찍는 모습

1924년 3월에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6월에 목포로 귀향하여 부친이 가문의 토지와 재산관리를 위해 설립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포부는 연극운동과 창작, 문예연구 활동을 더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가 해야 했던 회사 사장의 역할은 매우 분주하고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희곡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친이 그를 위해 '백수제' 라는 2층 서재를 지어주었는데 「정오」,「이영녀」,「난파」,「두덕이 시인의 환멸」,「산돼지」등이 이 무렵부터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출가하기 1년 전 장남 김방한(1925~2002, 전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이 태어났다.

이 한 살배기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후에 집을 나오고 나서도「출가」를 통해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현해탄 파도에 잠긴별

신문기사에 난 김우진 작가의 모습

김우진이 추구한 자유로운 삶과 문학적 포부로 인해 부친과 갈등을 겪었다. 당대 지식인으로서 마음대로 조국을 위해 활동할 수 없었던 일제식민지의 환경도 그를 절망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 결국 1926년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도쿄로 건너가 축지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친구 홍해성의 집에 기거했는데, 목포에서 보내오는 귀가 권고를 거절하면서까지 창작에 몰두하여 완성한 것이 마지막 희곡「산돼지」다.

한편 윤심덕은 오사카에 머무르면서 대표곡〈사의 찬미〉를 비롯한 20여곡을 취입하고 있었다. 도쿄에 머물던 김우진에게 어느 날 그녀로부터 자살하겠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그는 홍해성에게 '그녀를 말리러 가겠다' 알리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경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을 향해가던 관부연락선 덕수환 1등칸 3호실에 유서를 남기고 두 사람은 현해탄 바다로 투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