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억압을 고발 - 동반자적 문학

박화성은 1925년 『추석전야』가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발표되면서 문단에 나와 해방 전까지 많은 소설들을 창작하였다. 『추석전야』,『하수도공사』,『비탈』,『홍수전후』,『한귀』,『고향없는 사람들』,『호박』 그리고 장편 『백화』,『북국의 여명』등은 일제식민지 시대에서 가난하고 핍박받는 도시빈민과 농민들의 참상을 삶의 현장을 답사하여 형상화함으로써 리얼리즘 문학을 개척하였다. 박화성이 활발하게 작품을 썼던 1930년대 소설경향에 대해 평론가들은 동반자적 작품경향과 더불어 풍부한 어휘와 탄탄한 구성력을 특징으로 들고 있다. 김윤식은 "20년대 이미 데뷔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작가로서의 그의 역량에서 중요하며, 여류로서는 드물게 보는 사상성을 띤 작가"로 주목하였다. 김필봉은 "박화성씨는 문단에서 이미 정평이 나있고 지반이 굳은 분이니만큼 내용의 선택, 건축과 표현수법에 있어 무난 능숙함을 보여준다.

선이 굵고 특별한 매력은 없으나 침착하고 소박한 가운데서 원만한 경지를 보여 주는 문장이라 그 창작 태도에도 남성에게 지지 않는 늠름한 여유가 있어 장래에 더욱 대성할 듯한 믿음성을 준다." 백철은 "직접 카프와는 아무 관련이 없이 작품활동을 한 사람이지만 여류작가 박화성은 이 경향파에 속하는 유력한 작가 중의 한 사람". 이재선은 "프로 문학의 공식성을 계승한 작가"로, 서정자는 "박화성은 데뷔 당시부터 경향성을 띤 작품으로 등단...(중략)... 30년대 그의 문학에서 이 동반자적 경향은 그의 문학의 중요한 특색의 일면"이라 평가하고 있다.

박화성 전시관 내부모습

이어지는 역사의식 - 해방공간의 문

박화성은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시기에는 작품활동이 뜸하다가 1955년부터 집필 활동을 재개하였다. 남녀의 애정관계를 주로 다루 는 대중소설 즉 신문연재소설을 쓰면서도 일제강점기의 역사의식을 상징과 이중구조의 기법으로 창작하였다. 해방공간의 작품으로는 1946년 『봄안개』, 1984년『광풍속에서』, 1949『활화산』(게재 전 소설)등이 있고, 1905년『진달래처럼』(6·25전)이 있다. 『봄안개』는 동반자적 경향의 작품이고, 『광풍 속에서』는 헌법기초위원의 며느리가 광태 속에서 여성해방을 강변하는 이야기이다. 『진달래처럼』은 애잔한 연예소설이다. 작가는 상징기법으로 자신의 역사의식을 진달래로 비유하였다.

작가의 변함없는 세계관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내 가슴에 피어 있는 진달래는 누가 감히 꺾으려 들지 못할 것이다. 해마다 피는 진달래, 진달래처럼 붉은 내 정열!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을 것이다. 『진달래처럼』에서 발표하지는 못했으나 작가가 쓴 작품 연보에 1949년이라 명기한 단편 『활화산』은 제주 4·3사태를 다룬 작품이다. 『활화산』의 25년 후 판이라고 할 수 있는 『휴화산』은 제주도 4·3사태와 여순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활화산』의 내용도 그와 비슷할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박화성의 전 생애에 걸쳐 변함없었던 역사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타자적 여성의 삶 고발 - 후기 장편소설

박화성 작가 소설작품

《한국일보》에 『고개를 넘으면』을 연재하는 1955년부터 1966년까지를 후기 장편소설시대라 규정해 볼 수 있다. 1930년대 작품과 해방에서 6·25까지의 작가의식이 동반자적 성향이라 한다면, 1955년 이후는 소재의 다양성과 대중성의 도입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작품에서의 남녀의 사랑을 겉 주제로 속 주제는 역사의식을 드러내는 이중구조의 창작방법을 사용하였다. 1955년 이후 약 10년 동안 장편 『고개를 넘으면』,『사랑』,『벼랑에 피는 꽃』,『내일의 태양』,『바람뉘』,『창공에 그리다』,『너와 나의 합창』,『이브의 후예(『젊은 가로수』게재)』,『거리에는 바람이』등과 자서전 『눈보라의 운하』, 전기소설『타오르는 별』

『열매 익을 때까지』등 대부분 신문소설을 썼다. 이들 작품에서 작가는 가족제도의 허구성을 문제 삼으면서도 주인공들을 과거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예가 많다. 가족제도의 허구성을 문제 삼고 있지만 민족의식 내지는 사회에 대한 관심의 줄을 늦추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박화성의 신문소설에 대해 차범석은 "박화성이 끈기 있게 써낸 신문소설은 통속소설이나 대중소설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없는 진실과 소명감에 찬 소설들이다.소위 신문소설의 3대 요소가 섹스와 사건과 흥미본위의 세 태풍속이라는 잣대로 잰다면 박화성의 작품은 결코 그 축에 낄 수 없을 만큼 정통적이며 윤리적이며 보수적인 작품들이다."라고 평하였다.

날카로운 현실 비판 - 후기 단편소설

박화성의 작가의식은 80세에 이르도록 계속 작품을 발표한 후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합승 버스 조수 자리를 쫓겨났으나 선량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쓴 『비오는 저녁』. 역시 가난하나 성실한 택시 운전사의 하루를 그린 『성자와 큐피트』. 서구적 가치에 물들어가는 젊은이들의 의식을 비판한 『비취와 밀화』등은 세태소설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칠전팔기』,『휴화산』,『미로』,『마지막 편지』등은 박화성의 치열한 역사의식과 현실비판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작가가 타계하기 3년 전에 쓴 『마지막 편지』는 일제식민지 시대에서 학병으로 나가 사지에서 겨우 살라 돌아온 아들이 6·25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다. 83년 이산가족 찾기로 전국이 발칵 뒤집혔을 때 의용군으로 나갔다는 이유로 아들 찾는 광고 한 번 못해본 어머니의 안타까움을 담은 이야기이다. 드디어 일만 명에 돌파하게 되던 그날 나는 TV를 끄고 곰곰이 어째서 나는 생사초자 모르는 내 아들을 찾지 않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잠겼고 그 이유는 이산가족이 아닌 '의용군'으로 갔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편지』에서 눈보라와 휴화산의 문학! 『마지막 편지』한편만 보아도 작가가 평생 동안 얼마나 우리시대의 아픔을 작품의 살과 뼈로 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